
오전 10시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만 떴다. 몸은 아직 이불과의 장기 계약을 해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메일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여기까지 읽으면 안다.
아, 오늘도 탈락이구나.
이쯤 되면 기업에서 나를 뽑지 않는 게 아니라,
나와 기업 사이에 무슨 전생의 악연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친구는 취업했고, 동생은 자격증을 땄다. 엄마는 밥을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물으신다.“오늘은 면접 없어?”
“응, 오늘은 없어.”
“그럼 쉬겠네?”
아니요, 어머니. 면접은 없지만 걱정이라는 무급 정규직에 출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불합격 메일에는 그렇게 성실하게 답장하면서, 내 마음에는 한 번도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늘은 작전을 바꿨다.
아침부터 인생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그런 계획은 보통 오후 2시에 잠옷 차림으로 무너진다.
대신 세 가지만 했다.
첫째, 방을 정리했다.
일단 책상 위에 있던 컵 세 개를 치웠다.
놀랍게도 컵은 세 개인데 마신 사람은 한 명이었다.
둘째, 부족한 직무 역량을 30분 공부했다.
30분이면 세상을 바꾸기엔 짧지만,
어제의 나보다 조금 나아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셋째, 산책을 나갔다.
햇살을 받으며 걸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취업은 아직 안 됐지만,
적어도 오늘의 하늘은 나를 서류에서 탈락시키지 않았다.
물론 현실적인 준비는 계속해야 한다.
지원서를 고치고,
면접을 연습하고,
필요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 자신까지 탈락시킬 필요는 없다.
회사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 사이에는 아주 큰 간격이 있다.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고,
방향을 찾는 중이며,
다음 기회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러니 오늘도 해보자.
완벽한 이력서가 아니어도 좋다.
조금 서툴러도 좋다.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도 좋다.
취업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내 인생까지 보류 상태로 둘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의 나에게 합격 도장을 하나 찍어주자.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났음. 다음 단계 진행 가능.’
참고로 오늘의 면접관은 나 자신이다.
다행히 이 면접관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면 꽤 후한 점수를 준다.
당신의 합격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뿐,
당신의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도 당신의 인생을 응원한다. 파이팅!
오후 6시.
드디어 퇴근이다!
컴퓨터를 끄는 순간,
마음 속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한다.
현악기는 감동을 더하고,
트럼펫은 자유를 알린다.
그런데 그때 울리는 메신저.
‘혹시 잠깐만 확인 가능하실까요?’
잠깐이라는 말은 참 신기하다.
시계로는 5분인데,
마음으로는 5년이다.
결국 퇴근길 지하철에서 업무를 확인한다.
집에 도착해서도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침대에 누워서도 갑자기 오전 회의 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 그때 그냥 가만히 있을걸.’
이미 끝난 회의를 머릿속에서 재방송하는 능력.
화질은 4K인데 시청료는 수면 시간으로 지불한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돈을 벌려고 일하는 건지,
일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건지 가끔 헷갈린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은 작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퇴근 후 휴대폰을 내려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냉장고에 있던 음식을 꺼내 먹고,
창 밖의 나무를 바라봤다.
누가 보면 별일 아닌 일이다.
하지만 매일 해야 할 일에 밀려 있던 나에게는
꽤 근사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퇴근 후에는 나도 퇴근시킨다.
회사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내 영혼까지 24시간 근무할 필요는 없다.
물론 긴급한 업무나 책임져야 할 일은 상황에 맞게 처리하되,
불필요한 걱정까지 야근시킬 필요는 없다.
둘째, 나만의 작은 성장을 만든다.
하루 15분이라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관심 있던 분야를 공부한다.
회사의 성과와 별개로 내가 쌓아가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든든하다.
셋째, 나에게도 칭찬을 한다.
오늘 어려운 업무를 끝냈다면 잘했다고 말해준다.
실수했다면 고칠 방법을 찾는다.
실수 하나를 인생 전체의 결산 보고서로 만들지는 않는다.
넷째, 쉬는 시간에도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쉬는 것은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다.
다음 날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월급은 중요하다.
경력도 중요하고,
더 나은 기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만으로
내 인생을 채우려 하면,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퇴근 후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회사에서 무엇을 해냈지?’도 좋지만,
‘오늘 나는 무엇을 하며 행복했지?’라고도 물어보자.
오늘의 행복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맛있는 커피 한 잔,
좋아하는 드라마 한 편,
아무 생각 없이 걷는 20분이면 충분할 때도 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일하고, 내 인생에서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자.
그리고 오늘 밤만큼은 머릿속 회의실을 폐쇄하자.
안건은 내일 처리하고,
지금부터는 행복 담당자인 내가 회의를 진행한다.
첫 번째 안건은 간단하다.
‘오늘도 고생한 나에게 맛있는 것을 제공할 것.’
이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다.
아침 7시.
“엄마, 양말 어디 있어?”
“여보, 내 차 키 봤어?”
“엄마, 오늘 준비물 뭐야?”
집 안에서 하루에 가장 많이 호출되는 이름. 바로 엄마다.
엄마는 가족 전용 검색엔진이다.
양말 위치부터 냉장고 속 반찬의 유통기한까지 웬만한 정보는 다 알고 있다.
단 하나, 본인의 휴대폰을 어디에 뒀는지는 모른다.
한참 찾다가 발견한 곳은 냉장고 옆.
왜 거기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를 돌리고,
집안을 정리하고,
가족의 일정까지 챙긴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라면 여기에 회사 업무까지 추가된다.
엄마의 하루는 늘 꽉 차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족에게는 “힘들면 쉬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이것만 하고 쉬자”라고 한다.
그 ‘이것만’이 열 개쯤 쌓이는 날도 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는 선언했다.
“오늘은 나도 나를 좀 챙길 거야!”
가족들은 잠깐 조용해졌다.
마치 집안에 새로운 법이 공포된 것처럼.
엄마는 따뜻한 차를 준비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책도 펼쳤다.
그런데 3분 뒤.
“엄마!”
엄마는 눈을 감았다.
‘좋아. 나는 지금 산속의 명상가다. 나는 바람이다. 나는 평온이다.’
“엄마, 리모컨 어디 있어?”
‘나는… 리모컨을 아는 산속의 명상가다.’
웃고 말았지만, 그날 엄마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가족이 저절로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는 사실이다.
“나 지금 20분만 쉴게. 그동안 필요한 건 너희끼리 먼저 찾아봐.”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조금씩 가족도 스스로 해결하는 일이 늘었다.
엄마가 모든 것을 해주지 않아도 집은 돌아갔다.
가끔 양말이 짝짝이로 나오는 정도의 작은 사건은 발생했지만,
지구가 멸망하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엄마는 작은 약속을 만들었다.
하루 15분은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정하기.
힘들 때는 괜찮은 척하지 말고 도움을 요청하기.
하고 싶었던 공부나 취미를 다시 시작하기.
집안일이 조금 남아 있어도 가끔은 먼저 쉬기.
거울 속 나에게 “오늘도 잘했어”라고 말하기.
엄마도 꿈이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을 수도 있고,
혼자 여행을 가고 싶을 수도 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조용한 카페에서 한 시간쯤 앉아 있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모든 마음은 충분히 소중하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가족에게도 더 건강한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엄마는 가족의 조연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도 주인공이다.
그러니 오늘은 좋아하는 간식을 먼저 먹어도 좋다.
예쁜 옷을 입어도 좋고, 새로운 목표를 세워도 좋다.
그리고 누군가 “엄마, 이거 어디 있어?”라고 물으면 가끔은 이렇게 대답해 보자.
“그건 엄마의 마음속 평화와 함께 어딘가에 있단다. 오늘은 너도 한번 찾아보렴.”
엄마의 행복은 사치가 아니다.
오늘은 가족을 챙기는 손길만큼,
자기 마음도 따뜻하게 챙겨주자.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든든한 편 말이다.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하루의 피로와 가장다운 의지가 함께 담겨 있다.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밀린 일을 살펴보고,
내일 일정을 생각한다.
아빠는 가족에게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다.
힘든 일이 생기면 해결책을 찾고,
필요한 돈이 있으면 마련하고,
가족이 걱정하지 않도록 애쓴다.
그런데 가끔 아빠의 마음속에는 작은 경고창이 뜬다.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문제는 충전기를 어디에 꽂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휴대폰은 10%만 남아도 충전하면서,
자기 몸은 1%가 될 때까지 사용한다.
그리고 배터리가 꺼질 것 같을 때 하는 말.
“나는 괜찮아.”
아빠의 ‘괜찮아’는참 대단하다.
피곤해도 괜찮고,
걱정돼도 괜찮고,
어깨가 아파도 괜찮다.
그런데 어느 날 계단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잠깐 멈췄다.
문득 생각했다.
‘가족을 오래 지키려면 나도 오래 건강해야 하는데?’
그날 아빠는 자신에게도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작은 변화를 시작했다.
첫째, 건강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가벼운 산책을 하고, 몸의 이상 신호를 살피고,
필요한 검진과 진료도 챙기기로 했다.
가족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준비 중 하나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니까.
둘째, 새로운 것을 배우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 배우는 속도가 조금 느려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작할 자격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디지털 기술을 익혀도 좋고,
오래전부터 관심 있던 분야를 공부해도 좋다.
처음에는 서툴 수 있다.
괜찮다. 처음부터 잘하면 학원 선생님이 긴장하실 테니까.
셋째, 가족에게 속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요즘 조금 힘드네.”
이 한마디는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가족을 믿고 마음을 나누는 용기다.
넷째, 자신만의 즐거움을 되찾기로 했다.
좋아하는 운동,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
음악 감상,
혼자 떠나는 짧은 여행.
이런 작은 기쁨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다섯째,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을 넓히기로 했다.
가족에게 필요한 돈을 벌어오는 것만이 아빠의 가치는 아니다.
다정한 말 한마디,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
실수했을 때 인정하고 다시 노력하는 태도도 소중하다.
물론 가족을 책임지는 현실은 가볍지 않다.
생활비도 필요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며,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책임감이 자기 자신을 끝없이 소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아빠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살아갈 힘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빠 자신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오늘은 퇴근 후 잠깐 산책해 보자.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자신에게도 수고했다고 말해보자.
배터리가 부족하면 충전하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만 사람은 휴대폰처럼 케이블 하나로 충전되지 않으니,
잠과 휴식, 건강, 관계, 작은 성취를 골고루 챙겨야 한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낸 아빠에게 전하고 싶다.
“당신은 가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도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늘 밤에는 마음속 경고창을 닫고 충전 모드로 들어가자.|
내일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참고로 오늘의 충전은 무료다.
대신 자기 자신에게 조금 다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인생이 힘든 날에는
너무 심각하게만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취업이 안 되면 잠깐 쉬었다 다시 도전하고,
회사에서 지쳤다면 퇴근 후 내 마음도 퇴근시키고,
엄마라서 바빴다면 나를 위한 시간도 챙기고,
아빠라서 버텼다면 나에게도 충전할 시간을 주세요.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넘어지고, 가끔은 늦잠을 자고,
계획했던 일을 내일로 미루기도 하겠지요.
괜찮아요. 내일의 내가 조금 덜 미루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건네는 작은 친절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인생은 아직 공연 중입니다.
오늘 장면이 조금 엉망이었어도, 다음 장면은 다시 연출할 수 있으니까요.